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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


나폴레옹의 어린 시절

나폴레옹은 1796년 지중해의 코르시카라는 섬에서 태어났고 그 섬은 당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섬이었다. 그는 평범한 집안 즉 권력과는 상관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무도 그의 어린 시절의 모습 속에서 이 아이가 프랑스의 통치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만큼 그는 평범하고 특출나지 않았다.
그는 아홉살에 아버지에 의해 군사 학교에 보내졌다. 프랑스어도 할 줄 모르는 어린 그에게는 험난한 시련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 주로 전략과 전술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고 알렉산더 대왕이나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유명한 장군, 통치자가 되길 꿈꾸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과 기회

 

10대에 군에 입대하면서 그가 권력으로 이어지는 시작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 민중이 루이 16세 왕을 몰아내는 프랑스 혁명(1789-1793)으로 그는 기회를 얻었다. 혁명 이전 프랑스는 군주국이었고 그 말은 왕이나 귀족이 아니면 중요한 지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귀족들은 사회의 지도층이었고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은 단두대에서 왕과 왕비 귀족들의 머리를 자르며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부모와 태생에 기반한 사회적 위계를 종식하는 이 혁명에 나폴레옹은 당연히 열정적인 지지자였다.

1795년 많은 군중들이 왕을 다시 프랑스의 지도자로 세우려 모여들었고 나폴레옹과 그의 병사들은 거리에 대포를 설치해 300명 가량의 사람들을 죽였다. 나폴레옹은 수적으로 열세했지만 대포로 군중들은 해산시켰고 나폴레옹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잔인하고 공격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의 영웅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혁명을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폴레옹의 성격

 

나폴레옹은 굉장히 근면하면서 자신감이 넘쳤으며 매사에 경쟁에서 지는 것은 무엇보다 싫어했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몇 시간의 잠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남자는 6시간 여자는 7시간 바보는 8시간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음식 중 통닭구이에 감자튀김과 양파를 곁들여 먹는 것을 좋아했고 동료들과 카드 게임을 할 때 지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트라우마 같이 고양이를 무서워하고 열린 문을 극도로 싫어해서 그와 같이 있는 사람들은 항상 방문을 재빨리 닫아야 만 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사랑

 

1795년 나폴레옹은 운명의 연인 조세핀을 만나 1796년 결혼을 했다. 조세핀은 나폴레옹보다 6살 연상이었고 이미 두 자녀가 있었지만 사랑에 빠진 나폴레옹에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파리 사교계에서도 빼어난 미인이었던 조세핀은 나폴레옹과는 달리 그를 맹렬히 사랑하지는 않았다. 나폴레옹이 전쟁으로 나갔을 때에는 연하의 애인과 애정행각을 벌일 만큼 나폴레옹에게 큰 애정이 없었고 후에 나폴레옹에게 들켜 바람피운 것을 뉘우쳤지만 1810년 나폴레옹과 이혼하게 되었다.
조세핀과 나폴레옹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고 정치적 입지를 위해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게 된다.
한편 조세핀은 낭비벽이 매우 심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나폴레옹은 그녀와 이혼한 후에도 그녀가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말메종 궁전에서 지내게 해주었고 재정적으로 부족하지 않게 지원해 주었다.


<단 하루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소. 단 하룻밤도 그대를 내 팔에 끌어안지 않은 적이 없소. 어떤 여인도 그대만큼 큰 헌신과 열정, 자상함으로 사랑하지 않았소. 공감과 사랑, 진정한 감정으로 묶인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오. > 조세핀의 죽음을 전해 듣고 

나폴레옹의 유언은 "프랑스, 군대, 선봉, 조세핀"이었다.

나폴레옹은 진심으로 조세핀을 사랑했고 마지막 까지 그녀를 아꼈다. 

나폴레옹의 승리

 

프랑스혁명은 주변 나라들에 좋지 않은 사상이었고 프랑스는 곧 주변 나라들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이탈리아, 이집트, 오스트리아 등 많은 나라들과 전쟁을 벌였고 나폴레옹은 승리에 승리를 거두게 된다. 나폴레옹은 1799년 파리로 돌아와 자신의 군대를 사용해 의회를 해산시키고 스스로 권력을 잡았고 많은 시민들은 그를 특별한 영웅으로 생각했다.

나폴레옹은 노트르담 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스스로 왕관을 자기 머리에 얹으며 대담하게 황제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자유와 평등사상을 위해 나폴레옹 법전이라는 법률 체계를 도입하고 혁신적인 통치자로 프랑스를 다스렸다. 프랑스를 뛰어넘어 자유와 평등사상을 유럽 전역에 전파하기 위해 그는 군대를 강하게 육성하고 혁명사상으로 가득 찬 그의 군대는 차례로 이웃 나라들을 침략했다.

나폴레옹의 실수

 

그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유럽 전체의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에 60만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1812년 러시아를 침략했다. 러시아군은 끝없는 평원을 가로질러 후퇴해 버렸고 나폴레옹 군대가 먹을 만한 식량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모두 불태웠다. 결국 프랑스의 막강한 병사들은 굶어 죽어갔고 긴 전쟁에 9월 모스크바를 장악했지만 러시아군은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이 오고 전쟁에 필요한 공급 물자는 떨어져 가고 있어 나폴레옹은 퇴각하기로 결정했지만 혹독한 겨울의 얼음과 눈을 뚫고 가야만 했다. 기온이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지고 배고픔과 추위와 긴 행군으로 나폴레옹의 군사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 대부분 죽고 말았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아사와 추위로 죽어 싸울 수 있는 병사는 1만명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가 유럽에서 강대국이 되는 것을 견제하여 1815년 벨기에에서 진흙 벌판을 사이에 두고 나폴레옹과 맞서게 된다. 바로 그 유명한 워 덜 투 전쟁이 시작 되었다. 영국 군대와 그 연합군은 웰링턴 공작의 지휘를 받았는데 그는 나폴레옹과 나이가 같았고 권력 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엘리트였다. 처음 전투는 웰링턴에 불리하게 시작되었다. 진흙탕에 병사들이 움직이기 어려웠고 웰링턴의 병사들은 방어기지에서 고분분투 하였고 나폴레옹은 적극적인 공격으로 앞서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오후에 웰링턴의 연합군 프로이센 군대가 도착하고 나폴레옹은 드디어 패배하고 만다.



세인트헬레나섬

 

섬에서 태어났던 그는 또 다시 섬으로 유배되어 마지막 말년을 보내야만 했다. 나폴레옹은 이 섬에서 자기 삶의 회고록을 작성하고 많은 편지도 썼는데  51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어떤 역사가들은 독살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위암으로 죽었다고도 하는데 나폴레옹이 항상 손을 복부에 대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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